[1] 나는 특히 자기결정이론에 근거하여 학생들이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교육을 디자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과목은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세 가지 요소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고 자평하고 싶다(좀 민망하지만 가끔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다). 꽤 오래 전 학부 전공 필수과목에서 한 학생이 시험 점수에 대해 심하게 클레임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다른 학생들로부터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그 학생은 많은 과목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클레임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교육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전부터 뭔가 불편하던 점이 조금씩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시험과 평가를 피할 수 없는 것이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방법이 과연 최선의 방법일까? 내가 아는 내용을 가르치고 그걸 정답이라고 원하는 것이 교육의 정답일까? 이제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빨라 어제의 정답이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수업에서 떠들어놓고 매년 큰 변화 없이 비슷한 내용을 가르치고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10년 전쯤 조사된 바에 의하면, 서울대학교에서 A학점을 받는 학생은 많은 경우 교수의 강의를 토씨 하나, 농담 하나 빼놓지 않고 받아적었다가 시험지에 게워낸다(regurgitate: 유학 초기 배운 인상적 영단어 중 하나다). 나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 학생들은 주도적이고 비판적으로 배우지 않는 걸까? 이게 학생들의 잘못일까? 학생들의 능력이나 태도가 문제가 아니라 환경이 문제다. 학생들의 관행과 습관을 비판하기 전에 학교와 교수, 더 나아가 정부(교육부)와 정치권까지 모두 반성해야 한다. 창의적이고 협력적인 인간이 중요하다면서, 그런 인재를 기르는 것이 목표라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강의실 안팎의 풍경은 과연 어떠한가? 대학의 시스템이 그러한 교육을 허락하는가? 출석 체크를 제대로 하는지 지난 몇 년치 자료를 내라고 교육부가 감사하는 환경에서 무슨 교육이 제대로 되겠는가? 수업의 일정 이상을 출석하지 않는 학생에게 학점을 부여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교수의 자율권 침해, 즉 교권 침해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수업 안 듣고 내용을 잘 알 수 있는 천재적인 학생이 있다면 굳이 출석을 강요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물론 여기에는 교수들의 잘못도 있다. ‘얼마나 많은 교수들이 출석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아 이런 감사까지 할까?’라고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지만, 그것이 감사까지 받아야 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강의 평가만 해도 그렇다. 평가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내 기억이 틀릴 수 있지만, 내가 서울대학교에 부임한 2008년 이래 실질적 변화는 없었다). ‘이 강의는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강의 준비와 강의 내용이 충실하였다’, ‘교육방법이 효과적이었다’, 이 강의는 매우 만족스러우므로 주위에 권고하겠다’, ‘과제나 시험에 대한 담당 강의자의 피드백은 도움이 되었다’, ‘강의자는 결강 없이 충실히 진행되었다’, ‘이 강의를 통해 내 역량이 향상되었다’. 자, 어떤까? 이것이 과연 창의적이고 팀워크가 뛰어난 미래형 인재를 양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준인가? 전체적으로 보면, 이 항목들은 학생들의 ‘결과’적 느낌과 교수의 행동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교육의 ‘내용’이나 ‘과정’에 대한 질문은 없다. 강의가 서울대학교의 미션(창의성, 지성, 품성을 겸비한 글로벌 융합인재 양성)을 실현하는 측면에서 효과적인지를 반영하는 항목은 없다. 강의가 정말 창의적·비판적 사고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평가하는 항목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에서는 1년에 가르친 학생 수 X 강의평가를 통해 교육상 수여자를 추천한다. 정말 구시대적 발상 아닌가? 마케팅 언어로 이 현상을 풀어내면, 이것이야말로 미션과 내부 제도가 엊박자가 나는 잘못된 내부 마케팅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물론 나 역시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문제 의식이 있으면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쉽지 않다. 교육에 대해서는 대학별로, 전공에 따라, 교수 개인별로 바라보는 관점이 천양지차(天壤之差)이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강의에서 그간 수많은 실험을 해 왔다. 거의 예외없이 동일한 과목이라도 교재 및 강의 내용을 30% 이상 바꾸고, 새로운 교수법을 도입하기도 했다(이는 한편으로 내 능력의 부족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교육에 대한 나의 철학과 노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10여 년의 실험 이후, 그리고 성적 클레임 사건 이후, 나는 학부에서 가르치는 모든 과목에서 시험을 없앴다. 모든 평가는 수업 참여도, 창의적·비판적 사고를 요구하는(실은 ‘요구한다고 내가 주장하는’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리포트, 팀별 프로젝트와 동료 평가를 이용한다. 팀별 프로젝트는 가능한 제대로 된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과외활동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강의에 내재화시켰다. 내 교육 철학과 수업 방침에 동의하지 않는 학생은 굳이 의무적으로 수강하지 않도록 필수 과목은 더 이상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학생 수는 매번 기껏해야 50명을 넘지 않는다. 강의에 불만을 표시하는 학생도 있지만, 꽤 많은 학생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이라고 친구들에게 추천한다(그렇게 수강하는 학생들을 꽤 만났다). 단 한 명이라도 내 철학을 이해하고 동조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나는 그 학생을 보고 가려고 한다.
이제 다시 질문을 하나 던져 보자. 과연 수강생이 많은 과목이 좋은 과목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기준에 따라 그 판단은 달라지겠지만,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학생을 양성하려면 ‘철저하게’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는 강의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수강 인원 순으로 교육상을 선정하는 것은 20세기 사고 아닐까? 경영학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 ‘19세기 교과서로 20세기 마인드를 가진 교수(여기서는 교수는 전체 시스템을 지칭한다)가 21세기 학생을 가르친다’. 물론 기본적 지식을 성실하게 교과서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인 강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강의가 그렇게 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서울대학교도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갖고 새로운 도전을 해 오고 있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는 부족한다. 단순히 변화 정도가 아니라 변혁이 있어야 한다. 변혁에서 ‘혁(革)’은 동물에서 벗겨내어 가공한 가죽이다. 그야말로 가죽을 벗고 뼈를 깎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미네르바 대학을 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 일명 한국판 미네르바, 태재대학교의 실험이 어떻게 전개될지 몹시 흥미롭고 궁금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다. 태재대학교가 탄생하기 전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서울대학교에서 이러한 시도를 먼저 했었야 하지 않을까? 물론 서울대학교도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자유전공학부를 필두로 기초교육원과 혁신공유학부를 차례로 도입했고 2024년 3월에는 첨단융합학부를 새로 설립하였다. 이런 시도에 조금의 위안을 얻을 수는 있겠으나, 전체 교수의 자각과 시스템의 변혁이 없으면 제대로 된 혁신을 이루기는 어렵다.
다시 교육의 목적에 대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학생들은 정말 대학 강의로부터 배움의 즐거움, 앎의 즐거움, 그를 통한 자기 성장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을까? 그저 학점과 졸업장을 받는 수단으로 대학이 전락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교수)는 잘 정제된 지식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 지식 장사꾼과 뭐가 다르단말인가? 이런 생각이 밀려오면 강의에 회의(懷疑)가 밀려온다. 나는 적어도 내 강의에서만큼 학생들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토론하며 배운다는 것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고 싶다. 비록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시시때때로 절절히 느끼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노력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언제 이러한 생각이 멈출지 모르지만, 그 때가 되면 교수자로서의 나의 생명은 유통기한 만료다). 나야 50이 다 되어서야 배움의 즐거움을 ‘정말’ 조금씩 알기 시작했지만, 20대의 파릇파릇하고 톡톡튀며 재기발랄한 청년들이 그 즐거움을 알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전(全)지구적으로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2022년 언젠가부터 나는 수학 및 통계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내가 배움의 즐거움을 알게 된 한 가지 이유다. 요즘 워낙 빅데이터, 애널리틱스, 인공지능이 득세를 하고 있으니 비록 내 전공분야는 아니지만 나도 트렌드를 조금은 따라가야겠다는 작은 소망이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 수학 공부에 빠지고 만 것이다. 중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뛰어든 공부가 무슨 큰 소용을 발휘할 수 있겠냐만, 그래도 꼬리에 꼬리에 물고 파고 들다보면 많은 학문적 내용이 수학으로 귀착함을 느끼게 되었고,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동안 불편했던 문제가 하나씩 해소된다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있다. 물론 어려움을 느낄 때에는 좌절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마음과 생각의 자유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왜 그런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공부는 완수해야 할 임무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재미로 하는 ‘좋아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원 시절 여러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내가 지금 전공하는 마케팅 분야의 은사를 만났고, 비록 전공분야는 아니지만 계량경제학 분야 최고의 대가들로부터 수업을 듣는 행운을 얻었다(정식 수강은 아니고 청강이었다. 예전에는 이를 도둑 ‘도(盜)’를 써서 도강이라 불렀다). 그렇게 도강한 수업의 강의노트를 아직까지 가지고 있고, 지금도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참고한다.
저명한 철학자인 버트란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의 선생님이자,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과 교수였던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대학의 존재 목적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번역은 내가 직접 했는데, 문장이 다소 고어체로 적혀 있고 나의 번역 실력이 부족한 관계로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음을 양해 바란다. 나의 해석을 더한 부분은 꺾쇠괄호([ ]) 안에 기입했다). 나도 많은 부분 동의한다. 나의 교육 철학을 만들어 감에 있어서도 많은 영감을 준 글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언급된 것처럼,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과 새로움을 배태(胚胎)하고 있는 지식이 교류되는 장으로 나의 강의실을 만들고 싶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저 선생은 권위와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바(이게 오늘날 현실에서도 맞다는 보장도 없다)를 아래로 쏟아내는 죽은 공간으로서의 강의실을 거부한다.
“대학은 교육과 연구를 하는 학교입니다. 그러나 그 존재의 주된 이유는 학생들에게 전달되는 단순한 지식이나 교수진에게 제공되는 연구 기회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이 두 가지 기능은, 매우 값비싼 기관[대학]을 제외하고도,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수행될 수 있습니다. 책은 값이 싸고 도제 시스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단순한 정보 전달에 관해서라면, 15세기 인쇄술의 대중화 이후 어떤 대학도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학 설립의 주요 추진력은 오히려 그 이후에 생겼으며 최근에는 더욱 증가했습니다.
대학이 [사회에서] 정당화되는 이유는, 배움을 창의적으로 다룸에 있어 청년 세대[학생을 지칭함]와 장년 세대[교수를 지칭함]를 통합함으로써 지식[장년 세대의 몫]과 삶의 열정[청년 세대의 몫]을 연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대학은 정보를 전달하지만 창의적으로(상상력이 풍부한 방식으로) 전달합니다. 적어도 이것이야말로 대학이 사회를 위해 수행해야 하는 기능입니다. 이러한 기능에서 실패한 대학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배움을 창의적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흥분되고 신나는 분위기는 지식을 변모시킵니다. [지식적] 사실은 더 이상 단순한 사실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모든 가능성이 투여됩니다. 그러한 사실은 더 이상 기억에 부담을 줄 이유가 없습니다[외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의미]. 그것은 우리의 꿈을 노래하는 시인으로서, 그리고 우리 목적을 기획하는 설계자로서 [개인과 사회에] 생기(生氣)를 불어넣습니다."
[영어 원문] “The universities are schools of education, and schools of research. But the primary reason for their existence is not to be found either in the mere knowledge conveyed to the students or in the mere opportunities for research afforded to the members of the faculty. Both these functions could be performed at a cheaper rate, apart from these very expensive institutions. Books are cheap, and the system of apprenticeship is well understood. So far as the mere imparting of information is concerned, no university has had any justification for existence since the popularisation of printing in the fifteenth century. Yet the chief impetus to the foundation of universities came after that date, and in more recent times has even increased.
The justification for a university is that it preserves the connection between knowledge and the zest of life, by uniting the young and the old in the imaginative consideration of learning. The university imparts information, but it imparts it imaginatively. At least, this is the function which it should perform for society. A university which fails in this respect has no reason for existence. This atmosphere of excitement, arising from imaginative consideration, transforms knowledge. A fact is no longer a bare fact: it is invested with all its possibilities. It is no longer a burden on the memory: it is energising as the poet of our dreams, and as the architect of our purposes.”
[참고 문헌] 이혜정.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서울대생 1100명을 심층조사한 교육 탐사 프로젝트. 다산에듀. 2014-10-24; Whitehead, A. N. (1928). Universities and their function. Bulletin of the American Association of University Professors (1915-1955), 14(6), 448-450.
요즘에 노력형 과시소비라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떤 경우 노력 그 자체만으로 가치 있다고 평가한다. 이 분야는 아직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가치 인식의 대상이 상품(결과)뿐만 아니라 노력 그 자체(과정)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내재적으로 관심있고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노력의 경우,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극한의 신체적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고 암벽 등반이나 정상 등정에 도전하는 산악인들에게는 목표한 결과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이르는 과정에 더 많은 의미를 둔다. 혹자는 사람에 따라 선천적으로 힘든 과업을 수행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경우가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활동도 완수해야 하는 ‘일’로 제시된 경우보다 본인이 관심 있고 좋아서 하는 활동으로 제시된 경우 과정이 가치를 높이는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다.[1] 그 말은 일의 결과보다 과정의 즐거움에 집중하도록 만든다면 가치를 높게 평가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
[1] 나는 특히 자기결정이론에 근거하여 학생들이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을 경험할 수 있도록 교육을 디자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과목은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세 가지 요소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고 자평하고 싶다(좀 민망하지만 가끔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다). 꽤 오래 전 학부 전공 필수과목에서 한 학생이 시험 점수에 대해 심하게 클레임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다른 학생들로부터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그 학생은 많은 과목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클레임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교육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전부터 뭔가 불편하던 점이 조금씩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시험과 평가를 피할 수 없는 것이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방법이 과연 최선의 방법일까? 내가 아는 내용을 가르치고 그걸 정답이라고 원하는 것이 교육의 정답일까? 이제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빨라 어제의 정답이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수업에서 떠들어놓고 매년 큰 변화 없이 비슷한 내용을 가르치고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10년 전쯤 조사된 바에 의하면, 서울대학교에서 A학점을 받는 학생은 많은 경우 교수의 강의를 토씨 하나, 농담 하나 빼놓지 않고 받아적었다가 시험지에 게워낸다(regurgitate: 유학 초기 배운 인상적 영단어 중 하나다). 나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 학생들은 주도적이고 비판적으로 배우지 않는 걸까? 이게 학생들의 잘못일까? 학생들의 능력이나 태도가 문제가 아니라 환경이 문제다. 학생들의 관행과 습관을 비판하기 전에 학교와 교수, 더 나아가 정부(교육부)와 정치권까지 모두 반성해야 한다. 창의적이고 협력적인 인간이 중요하다면서, 그런 인재를 기르는 것이 목표라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강의실 안팎의 풍경은 과연 어떠한가? 대학의 시스템이 그러한 교육을 허락하는가? 출석 체크를 제대로 하는지 지난 몇 년치 자료를 내라고 교육부가 감사하는 환경에서 무슨 교육이 제대로 되겠는가? 수업의 일정 이상을 출석하지 않는 학생에게 학점을 부여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교수의 자율권 침해, 즉 교권 침해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수업 안 듣고 내용을 잘 알 수 있는 천재적인 학생이 있다면 굳이 출석을 강요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물론 여기에는 교수들의 잘못도 있다. ‘얼마나 많은 교수들이 출석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아 이런 감사까지 할까?’라고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지만, 그것이 감사까지 받아야 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강의 평가만 해도 그렇다. 평가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내 기억이 틀릴 수 있지만, 내가 서울대학교에 부임한 2008년 이래 실질적 변화는 없었다). ‘이 강의는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강의 준비와 강의 내용이 충실하였다’, ‘교육방법이 효과적이었다’, 이 강의는 매우 만족스러우므로 주위에 권고하겠다’, ‘과제나 시험에 대한 담당 강의자의 피드백은 도움이 되었다’, ‘강의자는 결강 없이 충실히 진행되었다’, ‘이 강의를 통해 내 역량이 향상되었다’. 자, 어떤까? 이것이 과연 창의적이고 팀워크가 뛰어난 미래형 인재를 양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준인가? 전체적으로 보면, 이 항목들은 학생들의 ‘결과’적 느낌과 교수의 행동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교육의 ‘내용’이나 ‘과정’에 대한 질문은 없다. 강의가 서울대학교의 미션(창의성, 지성, 품성을 겸비한 글로벌 융합인재 양성)을 실현하는 측면에서 효과적인지를 반영하는 항목은 없다. 강의가 정말 창의적·비판적 사고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평가하는 항목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에서는 1년에 가르친 학생 수 X 강의평가를 통해 교육상 수여자를 추천한다. 정말 구시대적 발상 아닌가? 마케팅 언어로 이 현상을 풀어내면, 이것이야말로 미션과 내부 제도가 엊박자가 나는 잘못된 내부 마케팅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물론 나 역시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문제 의식이 있으면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쉽지 않다. 교육에 대해서는 대학별로, 전공에 따라, 교수 개인별로 바라보는 관점이 천양지차(天壤之差)이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강의에서 그간 수많은 실험을 해 왔다. 거의 예외없이 동일한 과목이라도 교재 및 강의 내용을 30% 이상 바꾸고, 새로운 교수법을 도입하기도 했다(이는 한편으로 내 능력의 부족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교육에 대한 나의 철학과 노력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10여 년의 실험 이후, 그리고 성적 클레임 사건 이후, 나는 학부에서 가르치는 모든 과목에서 시험을 없앴다. 모든 평가는 수업 참여도, 창의적·비판적 사고를 요구하는(실은 ‘요구한다고 내가 주장하는’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리포트, 팀별 프로젝트와 동료 평가를 이용한다. 팀별 프로젝트는 가능한 제대로 된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과외활동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강의에 내재화시켰다. 내 교육 철학과 수업 방침에 동의하지 않는 학생은 굳이 의무적으로 수강하지 않도록 필수 과목은 더 이상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학생 수는 매번 기껏해야 50명을 넘지 않는다. 강의에 불만을 표시하는 학생도 있지만, 꽤 많은 학생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이라고 친구들에게 추천한다(그렇게 수강하는 학생들을 꽤 만났다). 단 한 명이라도 내 철학을 이해하고 동조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나는 그 학생을 보고 가려고 한다.
이제 다시 질문을 하나 던져 보자. 과연 수강생이 많은 과목이 좋은 과목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기준에 따라 그 판단은 달라지겠지만,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학생을 양성하려면 ‘철저하게’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는 강의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수강 인원 순으로 교육상을 선정하는 것은 20세기 사고 아닐까? 경영학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 ‘19세기 교과서로 20세기 마인드를 가진 교수(여기서는 교수는 전체 시스템을 지칭한다)가 21세기 학생을 가르친다’. 물론 기본적 지식을 성실하게 교과서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인 강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강의가 그렇게 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서울대학교도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갖고 새로운 도전을 해 오고 있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는 부족한다. 단순히 변화 정도가 아니라 변혁이 있어야 한다. 변혁에서 ‘혁(革)’은 동물에서 벗겨내어 가공한 가죽이다. 그야말로 가죽을 벗고 뼈를 깎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미네르바 대학을 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 일명 한국판 미네르바, 태재대학교의 실험이 어떻게 전개될지 몹시 흥미롭고 궁금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다. 태재대학교가 탄생하기 전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서울대학교에서 이러한 시도를 먼저 했었야 하지 않을까? 물론 서울대학교도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자유전공학부를 필두로 기초교육원과 혁신공유학부를 차례로 도입했고 2024년 3월에는 첨단융합학부를 새로 설립하였다. 이런 시도에 조금의 위안을 얻을 수는 있겠으나, 전체 교수의 자각과 시스템의 변혁이 없으면 제대로 된 혁신을 이루기는 어렵다.
다시 교육의 목적에 대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학생들은 정말 대학 강의로부터 배움의 즐거움, 앎의 즐거움, 그를 통한 자기 성장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을까? 그저 학점과 졸업장을 받는 수단으로 대학이 전락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교수)는 잘 정제된 지식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 지식 장사꾼과 뭐가 다르단말인가? 이런 생각이 밀려오면 강의에 회의(懷疑)가 밀려온다. 나는 적어도 내 강의에서만큼 학생들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토론하며 배운다는 것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고 싶다. 비록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시시때때로 절절히 느끼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노력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언제 이러한 생각이 멈출지 모르지만, 그 때가 되면 교수자로서의 나의 생명은 유통기한 만료다). 나야 50이 다 되어서야 배움의 즐거움을 ‘정말’ 조금씩 알기 시작했지만, 20대의 파릇파릇하고 톡톡튀며 재기발랄한 청년들이 그 즐거움을 알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전(全)지구적으로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2022년 언젠가부터 나는 수학 및 통계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내가 배움의 즐거움을 알게 된 한 가지 이유다. 요즘 워낙 빅데이터, 애널리틱스, 인공지능이 득세를 하고 있으니 비록 내 전공분야는 아니지만 나도 트렌드를 조금은 따라가야겠다는 작은 소망이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 수학 공부에 빠지고 만 것이다. 중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뛰어든 공부가 무슨 큰 소용을 발휘할 수 있겠냐만, 그래도 꼬리에 꼬리에 물고 파고 들다보면 많은 학문적 내용이 수학으로 귀착함을 느끼게 되었고,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동안 불편했던 문제가 하나씩 해소된다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있다. 물론 어려움을 느낄 때에는 좌절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마음과 생각의 자유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왜 그런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공부는 완수해야 할 임무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재미로 하는 ‘좋아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원 시절 여러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내가 지금 전공하는 마케팅 분야의 은사를 만났고, 비록 전공분야는 아니지만 계량경제학 분야 최고의 대가들로부터 수업을 듣는 행운을 얻었다(정식 수강은 아니고 청강이었다. 예전에는 이를 도둑 ‘도(盜)’를 써서 도강이라 불렀다). 그렇게 도강한 수업의 강의노트를 아직까지 가지고 있고, 지금도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참고한다.
저명한 철학자인 버트란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3rd Earl Russell)의 선생님이자,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과 교수였던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대학의 존재 목적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번역은 내가 직접 했는데, 문장이 다소 고어체로 적혀 있고 나의 번역 실력이 부족한 관계로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음을 양해 바란다. 나의 해석을 더한 부분은 꺾쇠괄호([ ]) 안에 기입했다). 나도 많은 부분 동의한다. 나의 교육 철학을 만들어 감에 있어서도 많은 영감을 준 글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언급된 것처럼,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과 새로움을 배태(胚胎)하고 있는 지식이 교류되는 장으로 나의 강의실을 만들고 싶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저 선생은 권위와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바(이게 오늘날 현실에서도 맞다는 보장도 없다)를 아래로 쏟아내는 죽은 공간으로서의 강의실을 거부한다.
“대학은 교육과 연구를 하는 학교입니다. 그러나 그 존재의 주된 이유는 학생들에게 전달되는 단순한 지식이나 교수진에게 제공되는 연구 기회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이 두 가지 기능은, 매우 값비싼 기관[대학]을 제외하고도,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수행될 수 있습니다. 책은 값이 싸고 도제 시스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단순한 정보 전달에 관해서라면, 15세기 인쇄술의 대중화 이후 어떤 대학도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학 설립의 주요 추진력은 오히려 그 이후에 생겼으며 최근에는 더욱 증가했습니다.
대학이 [사회에서] 정당화되는 이유는, 배움을 창의적으로 다룸에 있어 청년 세대[학생을 지칭함]와 장년 세대[교수를 지칭함]를 통합함으로써 지식[장년 세대의 몫]과 삶의 열정[청년 세대의 몫]을 연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대학은 정보를 전달하지만 창의적으로(상상력이 풍부한 방식으로) 전달합니다. 적어도 이것이야말로 대학이 사회를 위해 수행해야 하는 기능입니다. 이러한 기능에서 실패한 대학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배움을 창의적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흥분되고 신나는 분위기는 지식을 변모시킵니다. [지식적] 사실은 더 이상 단순한 사실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모든 가능성이 투여됩니다. 그러한 사실은 더 이상 기억에 부담을 줄 이유가 없습니다[외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의미]. 그것은 우리의 꿈을 노래하는 시인으로서, 그리고 우리 목적을 기획하는 설계자로서 [개인과 사회에] 생기(生氣)를 불어넣습니다."
“The universities are schools of education, and schools of research. But the primary reason for their existence is not to be found either in the mere knowledge conveyed to the students or in the mere opportunities for research afforded to the members of the faculty. Both these functions could be performed at a cheaper rate, apart from these very expensive institutions. Books are cheap, and the system of apprenticeship is well understood. So far as the mere imparting of information is concerned, no university has had any justification for existence since the popularisation of printing in the fifteenth century. Yet the chief impetus to the foundation of universities came after that date, and in more recent times has even increased.
The justification for a university is that it preserves the connection between knowledge and the zest of life, by uniting the young and the old in the imaginative consideration of learning. The university imparts information, but it imparts it imaginatively. At least, this is the function which it should perform for society. A university which fails in this respect has no reason for existence. This atmosphere of excitement, arising from imaginative consideration, transforms knowledge. A fact is no longer a bare fact: it is invested with all its possibilities. It is no longer a burden on the memory: it is energising as the poet of our dreams, and as the architect of our purposes.”
[참고 문헌] 이혜정.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서울대생 1100명을 심층조사한 교육 탐사 프로젝트. 다산에듀. 2014-10-24; Whitehead, A. N. (1928). Universities and their function. Bulletin of the American Association of University Professors (1915-1955), 14(6), 448-450.